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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1 | +## AI를 배울수록 붓펜이 필요했다 |
| 2 | + |
| 3 | +새로운 AI 활용법을 익힐수록 이상하게 붓펜이 필요해졌다. 문제는 기술이 어려운 |
| 4 | +것이 아니라, 따라갈수록 내가 나를 더 자주 채점하게 된다는 점이었다. |
| 5 | + |
| 6 | +개발 트렌드를 따라가고, 이직을 위해 포트폴리오와 면접을 반복하는 동안 그 감각은 |
| 7 | +더 선명해졌다. 오늘은 무엇을 배웠는지, 어떤 결과를 냈는지, 얼마나 성장했는지, |
| 8 | +다음 기회에는 어떻게 더 잘 증명할 수 있는지. 이런 질문은 분명 필요하다. 하지만 |
| 9 | +하루 전체가 이 질문으로만 채워지면 삶이 평가표처럼 변한다. 잘한 날에는 잠깐 |
| 10 | +안도하고, 거절당한 날에는 내가 통째로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진다. |
| 11 | + |
| 12 | +그래서 거창한 취미가 아니라,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. |
| 13 | +서예라고 부르기엔 조금 가벼워도 괜찮았다. 오히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커다란 벼루나 |
| 14 | +좋은 화선지가 아니라, 퇴근 후 책상 위에 바로 꺼낼 수 있는 작은 시간이었다. |
| 15 | + |
| 16 | +직접 계기는 한 영상이었다. 다만 그 장면이 유독 오래 남은 이유는 이미 내가 AI와 |
| 17 | +이직 준비의 속도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. |
| 18 | + |
| 19 | +우연히 유튜브 채널 `안녕하세요 원이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`, 줄여서 |
| 20 | +안원잘부의 [`미나미의 본모습`](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wdH5_I7UiHA) |
| 21 | +편을 봤다. 2026년 6월 28일 공개된 27분 46초짜리 영상이었다. |
| 22 | + |
| 23 | +처음에는 리센느 멤버 미나미를 보는 마음이 단순했다. 노래를 잘하고, 무대를 잘 |
| 24 | +하고, 오랜 시간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버틴 사람. 내 머릿속 이미지는 거기까지였다. |
| 25 | +화면 속에서 묵묵히 서예를 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, 내가 보고 있던 사람이 조금 다르게 |
| 26 | +보였다. |
| 27 | + |
| 28 | +화려한 무대 위의 사람이 아니라, 무대 밖에서도 자기 시간을 오래 연습해온 한 |
| 29 | +사람처럼 보였다. |
| 30 | + |
| 31 | +영상 중반부에는 서예 학원 교실로 보이는 공간이 나온다. 벽에는 연습한 글씨와 |
| 32 | +작품들이 빼곡히 붙어 있고, 미나미는 종이 앞에 앉아 붓을 잡는다. 그 장면이 이상하게 |
| 33 | +오래 남았다. 서예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보다, 내 눈에는 바깥에서 계속 평가받는 일을 |
| 34 | +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미나미가 붓을 잡는 시간을 자기 삶 안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|
| 35 | +크게 보였다. |
| 36 | + |
| 37 | + |
| 38 | + |
| 39 | +출처: [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 - 미나미의 본모습](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wdH5_I7UiHA&t=920s), |
| 40 | +15분 20초 부근 캡처. |
| 41 | + |
| 42 | +나는 서예 교실의 리듬이 부러웠다. |
| 43 | + |
| 44 | +그 뒤로 쿠팡에서 붓펜을 주문했다. 주문 목록에 남은 제품명은 `쿠레타케 붓펜 22호 + |
| 45 | +리필용 3p`였다. 붓펜 본품에 리필 카트리지 3개가 함께 들어 있는 구성이고, 가격은 |
| 46 | +만원 남짓이었다. 퇴근 후 책상 위에 붓펜 하나와 연습용 종이 몇 장만 꺼내면 됐다. |
| 47 | + |
| 48 | +## 늘 바깥의 것을 쫓고 있었다 |
| 49 | + |
| 50 | +개발자로 살다 보면 바깥의 변화를 계속 의식하게 된다. |
| 51 | + |
| 52 | +프레임워크는 바뀌고, AI 도구는 매주 새 기능을 내놓고, 좋은 개발자가 갖춰야 할 |
| 53 | +기준도 계속 높아지는 것처럼 보인다. 이직을 준비할 때는 압박이 더 선명해진다. |
| 54 | +내 경험을 다시 정리하고,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, 면접에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로 |
| 55 | +바꾸고, 결과를 기다린다. |
| 56 | + |
| 57 | +이 과정은 필요하다. 문제는 그것만으로 하루가 가득 찰 때다. |
| 58 | + |
| 59 | +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원래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.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배움은 |
| 60 | +즐거움보다 압박에 가까워졌다. 새로운 AI 활용법을 보면 호기심보다 먼저 불안이 |
| 61 | +올라왔다. 저걸 모르면 뒤처지는 건 아닐까. 지금 내 방식은 낡아지는 건 아닐까. |
| 62 | +이미 잘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너무 늦은 건 아닐까. |
| 63 | + |
| 64 | +이직 과정에서 거절을 겪으면 불안은 더 날카로워진다. 거절은 한 회사의 판단일 |
| 65 | +뿐인데, 마음은 그것을 내 전체에 대한 판정처럼 받아들인다. 머리로는 안다. 타이밍, |
| 66 | +핏, 포지션, 경쟁률, 회사의 상황까지 수많은 변수가 있다는 것을 안다. 그래도 |
| 67 | +마음은 자꾸 단순한 문장으로 도망간다. |
| 68 | + |
| 69 | +나는 아직 부족한가 보다. |
| 70 | + |
| 71 | +`나는 아직 부족한가 보다`라는 문장을 계속 들여다보는 일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. |
| 72 | +부족한 부분을 개선하는 것과, |
| 73 | +상처 입은 마음을 계속 만지는 것은 다르다. 전자는 다음 행동을 만들지만 후자는 |
| 74 | +나를 계속 같은 자리로 돌려보낸다. |
| 75 | + |
| 76 | +나는 이 차이를 알면서도 자주 후자에 머물렀다. |
| 77 | + |
| 78 | +## 붓펜은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|
| 79 | + |
| 80 | +그렇게 책상 위에 붓펜을 올려두고 나서야 알았다. |
| 81 | + |
| 82 | +정식으로 먹을 갈고, 붓을 씻고, 화선지를 준비하는 서예는 아직 나에게 너무 |
| 83 | +멀었다. 시작부터 거창하면 또 하나의 숙제가 될 것 같았다. 잘해야 하는 취미, |
| 84 | +장비를 갖춰야 하는 취미, 남에게 보여줄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취미가 되는 순간 |
| 85 | +나는 금방 지칠 것 같았다. |
| 86 | + |
| 87 | +내게 필요했던 것은 실력이 아니라 시간이었다. |
| 88 | + |
| 89 | +쿠레타케 붓펜은 시작점을 낮춰준다는 점에서 적당했다. 뚜껑을 열면 바로 시작할 수 |
| 90 | +있고, 실패해도 버릴 종이 한 장이면 충분하다. 준비 시간이 길지 않으니 핑계도 |
| 91 | +줄어든다. 유튜브로 붓 잡는 법과 기본 획을 찾아보며, 처음에는 유명한 사자성어부터 |
| 92 | +천천히 적어봤다. `진인사대천명`, `백화요란`, `대기만성`처럼 뜻이 익숙한 말을 |
| 93 | +고르고, 가족들의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어보기도 했다. |
| 94 | + |
| 95 | +붓펜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컴파일 에러가 없다. 면접관도 없다. 트렌드도 없다. 잘 |
| 96 | +썼는지 못 썼는지조차 사실 중요하지 않다. |
| 97 | + |
| 98 | +종이에는 선이 남는다. |
| 99 | + |
| 100 | +힘을 너무 주면 획이 둔해지고, 마음이 급하면 선이 흐트러진다. 손목이 들뜨면 |
| 101 | +끝이 어색하고, 호흡이 가라앉으면 조금 더 단정해진다. 신기한 것은 남은 선이 |
| 102 | +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. 붓펜은 나를 평가하지 않지만, 내 상태를 숨기지도 |
| 103 | +않는다. |
| 104 | + |
| 105 | +그래서 오히려 편하다. |
| 106 | + |
| 107 | +코드는 틀리면 고치면 된다. 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다시 쓰면 된다. AI와 |
| 108 | +대화할 때도 프롬프트를 바꾸고, 결과를 다시 요청하고, 마음에 드는 버전을 고르면 |
| 109 | +된다. 반면 종이 위의 획은 한 번 지나가면 그대로 남는다. |
| 110 | + |
| 111 | +처음에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. 삐끗한 선을 보면 종이를 구기고 싶었다. |
| 112 | +몇 번 반복하다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. 한 획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음 획을 |
| 113 | +조금 더 천천히 가져가면 전체의 균형이 조금은 돌아온다. 완벽한 한 획보다 중요한 것은 |
| 114 | +끝까지 한 글자를 완성하는 일이었다. |
| 115 | + |
| 116 | +삶도 종종 비슷한 방식으로 굴러간다. |
| 117 | + |
| 118 | +실패한 면접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. 어긋난 관계의 감정을 완전히 되감기도 |
| 119 | +어렵다. 이미 지나간 선택을 깨끗하게 지우는 `Ctrl + Z`는 현실에 없다. 그렇다고 |
| 120 | +삐끗한 한 획 때문에 전체 글자를 버릴 필요는 없다. 다음 획의 무게를 조절하고, 남은 |
| 121 | +공간을 다시 보고, 끝까지 써 내려가면 된다. |
| 122 | + |
| 123 | +붓펜을 잡는 일은 이런 태도를 작게 연습하게 한다. |
| 124 | + |
| 125 | +## 내실은 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덜 흔들리는 일이다 |
| 126 | + |
| 127 | +예전에는 내실을 더 많이 채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. |
| 128 | + |
| 129 | +더 많이 공부하고, 더 많은 프로젝트를 만들고, 더 많은 글을 쓰고, 더 많은 도구를 |
| 130 | +익히는 것. 물론 축적은 중요하다. 실제로 개발자는 계속 배워야 하고, 커리어를 |
| 131 | +바꾸려면 준비도 필요하다.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. |
| 132 | + |
| 133 | +많이 채웠는데도 쉽게 흔들리는 날이 있었다. |
| 134 | + |
| 135 | +흔들리는 날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인풋이 아니었다. 새로운 강의도, 더 화려한 툴도, 더 |
| 136 | +자극적인 성공담도 아니었다. 오히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. |
| 137 | +무언가를 더 넣는 시간이 아니라, 이미 내 안에 쌓인 것들을 조용히 정리하는 시간이 |
| 138 | +필요했다. |
| 139 | + |
| 140 | +안원잘부 미나미 편에서 받은 인상도 비슷했다. 내가 미나미의 삶을 다 아는 것은 |
| 141 | +아니다. 다만 화면 속 서예 학원 장면에서, 바깥의 화려함과 별개로 정해진 시간에 몸을 |
| 142 | +앉히고 손을 움직이는 태도를 봤다. 팬으로서의 호감보다 더 사적인 울림이었다. |
| 143 | + |
| 144 | +나에게도 비슷한 시간이 필요했다. |
| 145 | + |
| 146 | +새로운 AI 활용법을 익히는 시간도 나를 위한 시간일 수 있다. 개발 트렌드를 공부하는 |
| 147 | +시간도 나를 위한 시간일 수 있다. 이직을 준비하는 시간도 결국 나를 위한 시간일 수 |
| 148 | +있다. 하지만 배움과 준비가 계속 바깥의 기준을 향해 있을 때, 나는 나를 위한 시간을 |
| 149 | +보내면서도 정작 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. |
| 150 | + |
| 151 | +붓펜을 쥐는 시간은 방향이 다르다. |
| 152 | + |
| 153 | +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지 않는다. 이력서에 적을 수도 없다. 생산성 도구로 |
| 154 | +분류하기도 어렵다. 투자 대비 결과를 따지면 효율이 좋은 활동도 아니다. 바로 |
| 155 | +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살린다. |
| 156 | + |
| 157 | +쓸모가 없어서,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 된다. |
| 158 | + |
| 159 | +## 취미는 도망이 아니라 돌아올 자리다 |
| 160 | + |
| 161 | +취미를 가진다는 말을 예전에는 조금 가볍게 생각했다. |
| 162 | + |
| 163 | +남는 시간에 하는 일, 스트레스를 푸는 일, 취향을 표현하는 일 정도로 여겼다. 요즘은 |
| 164 | +조금 다르게 생각한다. 취미는 삶의 본업에서 도망치는 통로라기보다, 본업의 언어에서 |
| 165 | +잠시 나를 데려오는 자리일 수 있다. |
| 166 | + |
| 167 | +이 자리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. |
| 168 | + |
| 169 | +내 경우에는 만원 남짓한 쿠레타케 붓펜 세트 하나면 충분했다. 리필 카트리지까지 |
| 170 | +포함된 구성이라도 시작은 가벼웠다. 먹을 갈지 않아도 된다. 좋은 도구를 갖추지 |
| 171 | +않아도 된다. 누가 봐도 훌륭한 글씨를 쓰지 않아도 된다. 중요한 것은 붓펜을 잡는 |
| 172 | +시간이 온전히 나에게 돌아오는가다. |
| 173 | + |
| 174 | +하루 종일 바깥의 언어로 나를 설명하고 돌아온 날, 나는 종이 위에 조용히 한 글자를 |
| 175 | +쓴다. 오늘의 불안이 조금 흔들린 선으로 남기도 하고,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은 날은 |
| 176 | +획의 끝이 조금 단정해지기도 한다. 결과가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. |
| 177 | + |
| 178 | +붓펜 앞에서는 내가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. |
| 179 | + |
| 180 | +언젠가 다시 새로운 도구를 배울 것이다. 또 다른 기술 트렌드를 따라갈 것이고, |
| 181 | +다음 기회를 위해 나를 설명하는 문장을 고칠 것이다. 거절도 다시 겪을 수 있다. |
| 182 | +이 모든 일을 멈출 생각은 없다. 다만 속도를 따라가는 하루 사이에 작은 자리 하나를 |
| 183 | +두려고 한다. |
| 184 | + |
| 185 | +화면을 끄고, 붓펜 뚜껑을 열고, 종이 위에 선을 긋는 자리. |
| 186 | + |
| 187 | +종이 앞에서는 아무도 나를 채점하지 않는다. 나도 나를 채점하지 않는다. 이미 지나간 |
| 188 | +획을 받아들이고, 다음 획을 조금 더 단정하게 가져갈 뿐이다. |
| 189 | + |
| 190 | +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내실은 대단한 성장담이 아니라 이런 시간에서 시작되는 |
| 191 | +것일지도 모른다. 더 빠르게 따라잡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,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|
| 192 | +되는 것. 남에게 보여줄 결과를 하나 더 만드는 것보다,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|
| 193 | +하나 갖는 것. |
| 194 | + |
| 195 | +그래서 나는 오늘도 거창한 준비 없이 붓펜 뚜껑을 연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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