diff --git "a/posts/AI\353\245\274-\353\260\260\354\232\270\354\210\230\353\241\235-\353\266\223\355\216\234\354\235\264-\355\225\204\354\232\224\355\226\210\353\213\244/index.mdx" "b/posts/AI\353\245\274-\353\260\260\354\232\270\354\210\230\353\241\235-\353\266\223\355\216\234\354\235\264-\355\225\204\354\232\224\355\226\210\353\213\244/index.mdx" new file mode 100644 index 00000000..61581364 --- /dev/null +++ "b/posts/AI\353\245\274-\353\260\260\354\232\270\354\210\230\353\241\235-\353\266\223\355\216\234\354\235\264-\355\225\204\354\232\224\355\226\210\353\213\244/index.mdx" @@ -0,0 +1,195 @@ +## AI를 배울수록 붓펜이 필요했다 + +새로운 AI 활용법을 익힐수록 이상하게 붓펜이 필요해졌다. 문제는 기술이 어려운 +것이 아니라, 따라갈수록 내가 나를 더 자주 채점하게 된다는 점이었다. + +개발 트렌드를 따라가고, 이직을 위해 포트폴리오와 면접을 반복하는 동안 그 감각은 +더 선명해졌다. 오늘은 무엇을 배웠는지, 어떤 결과를 냈는지, 얼마나 성장했는지, +다음 기회에는 어떻게 더 잘 증명할 수 있는지. 이런 질문은 분명 필요하다. 하지만 +하루 전체가 이 질문으로만 채워지면 삶이 평가표처럼 변한다. 잘한 날에는 잠깐 +안도하고, 거절당한 날에는 내가 통째로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진다. + +그래서 거창한 취미가 아니라,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. +서예라고 부르기엔 조금 가벼워도 괜찮았다. 오히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커다란 벼루나 +좋은 화선지가 아니라, 퇴근 후 책상 위에 바로 꺼낼 수 있는 작은 시간이었다. + +직접 계기는 한 영상이었다. 다만 그 장면이 유독 오래 남은 이유는 이미 내가 AI와 +이직 준비의 속도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. + +우연히 유튜브 채널 `안녕하세요 원이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`, 줄여서 +안원잘부의 [`미나미의 본모습`](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wdH5_I7UiHA) +편을 봤다. 2026년 6월 28일 공개된 27분 46초짜리 영상이었다. + +처음에는 리센느 멤버 미나미를 보는 마음이 단순했다. 노래를 잘하고, 무대를 잘 +하고, 오랜 시간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버틴 사람. 내 머릿속 이미지는 거기까지였다. +화면 속에서 묵묵히 서예를 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, 내가 보고 있던 사람이 조금 다르게 +보였다. + +화려한 무대 위의 사람이 아니라, 무대 밖에서도 자기 시간을 오래 연습해온 한 +사람처럼 보였다. + +영상 중반부에는 서예 학원 교실로 보이는 공간이 나온다. 벽에는 연습한 글씨와 +작품들이 빼곡히 붙어 있고, 미나미는 종이 앞에 앉아 붓을 잡는다. 그 장면이 이상하게 +오래 남았다. 서예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보다, 내 눈에는 바깥에서 계속 평가받는 일을 +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미나미가 붓을 잡는 시간을 자기 삶 안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+크게 보였다. + +![안원잘부 '미나미의 본모습' 영상 15분 20초 부근에서 미나미가 서예 학원 교실에 앉아 붓을 잡고 있는 장면 캡처](/images/posts/AI를-배울수록-붓펜이-필요했다/minami-calligraphy-classroom.png) + +출처: [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 - 미나미의 본모습](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wdH5_I7UiHA&t=920s), +15분 20초 부근 캡처. + +나는 서예 교실의 리듬이 부러웠다. + +그 뒤로 쿠팡에서 붓펜을 주문했다. 주문 목록에 남은 제품명은 `쿠레타케 붓펜 22호 + +리필용 3p`였다. 붓펜 본품에 리필 카트리지 3개가 함께 들어 있는 구성이고, 가격은 +만원 남짓이었다. 퇴근 후 책상 위에 붓펜 하나와 연습용 종이 몇 장만 꺼내면 됐다. + +## 늘 바깥의 것을 쫓고 있었다 + +개발자로 살다 보면 바깥의 변화를 계속 의식하게 된다. + +프레임워크는 바뀌고, AI 도구는 매주 새 기능을 내놓고, 좋은 개발자가 갖춰야 할 +기준도 계속 높아지는 것처럼 보인다. 이직을 준비할 때는 압박이 더 선명해진다. +내 경험을 다시 정리하고,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, 면접에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로 +바꾸고, 결과를 기다린다. + +이 과정은 필요하다. 문제는 그것만으로 하루가 가득 찰 때다. + +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원래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.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배움은 +즐거움보다 압박에 가까워졌다. 새로운 AI 활용법을 보면 호기심보다 먼저 불안이 +올라왔다. 저걸 모르면 뒤처지는 건 아닐까. 지금 내 방식은 낡아지는 건 아닐까. +이미 잘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너무 늦은 건 아닐까. + +이직 과정에서 거절을 겪으면 불안은 더 날카로워진다. 거절은 한 회사의 판단일 +뿐인데, 마음은 그것을 내 전체에 대한 판정처럼 받아들인다. 머리로는 안다. 타이밍, +핏, 포지션, 경쟁률, 회사의 상황까지 수많은 변수가 있다는 것을 안다. 그래도 +마음은 자꾸 단순한 문장으로 도망간다. + +나는 아직 부족한가 보다. + +`나는 아직 부족한가 보다`라는 문장을 계속 들여다보는 일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. +부족한 부분을 개선하는 것과, +상처 입은 마음을 계속 만지는 것은 다르다. 전자는 다음 행동을 만들지만 후자는 +나를 계속 같은 자리로 돌려보낸다. + +나는 이 차이를 알면서도 자주 후자에 머물렀다. + +## 붓펜은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+ +그렇게 책상 위에 붓펜을 올려두고 나서야 알았다. + +정식으로 먹을 갈고, 붓을 씻고, 화선지를 준비하는 서예는 아직 나에게 너무 +멀었다. 시작부터 거창하면 또 하나의 숙제가 될 것 같았다. 잘해야 하는 취미, +장비를 갖춰야 하는 취미, 남에게 보여줄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취미가 되는 순간 +나는 금방 지칠 것 같았다. + +내게 필요했던 것은 실력이 아니라 시간이었다. + +쿠레타케 붓펜은 시작점을 낮춰준다는 점에서 적당했다. 뚜껑을 열면 바로 시작할 수 +있고, 실패해도 버릴 종이 한 장이면 충분하다. 준비 시간이 길지 않으니 핑계도 +줄어든다. 유튜브로 붓 잡는 법과 기본 획을 찾아보며, 처음에는 유명한 사자성어부터 +천천히 적어봤다. `진인사대천명`, `백화요란`, `대기만성`처럼 뜻이 익숙한 말을 +고르고, 가족들의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어보기도 했다. + +붓펜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컴파일 에러가 없다. 면접관도 없다. 트렌드도 없다. 잘 +썼는지 못 썼는지조차 사실 중요하지 않다. + +종이에는 선이 남는다. + +힘을 너무 주면 획이 둔해지고, 마음이 급하면 선이 흐트러진다. 손목이 들뜨면 +끝이 어색하고, 호흡이 가라앉으면 조금 더 단정해진다. 신기한 것은 남은 선이 +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. 붓펜은 나를 평가하지 않지만, 내 상태를 숨기지도 +않는다. + +그래서 오히려 편하다. + +코드는 틀리면 고치면 된다. 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다시 쓰면 된다. AI와 +대화할 때도 프롬프트를 바꾸고, 결과를 다시 요청하고, 마음에 드는 버전을 고르면 +된다. 반면 종이 위의 획은 한 번 지나가면 그대로 남는다. + +처음에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. 삐끗한 선을 보면 종이를 구기고 싶었다. +몇 번 반복하다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. 한 획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음 획을 +조금 더 천천히 가져가면 전체의 균형이 조금은 돌아온다. 완벽한 한 획보다 중요한 것은 +끝까지 한 글자를 완성하는 일이었다. + +삶도 종종 비슷한 방식으로 굴러간다. + +실패한 면접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. 어긋난 관계의 감정을 완전히 되감기도 +어렵다. 이미 지나간 선택을 깨끗하게 지우는 `Ctrl + Z`는 현실에 없다. 그렇다고 +삐끗한 한 획 때문에 전체 글자를 버릴 필요는 없다. 다음 획의 무게를 조절하고, 남은 +공간을 다시 보고, 끝까지 써 내려가면 된다. + +붓펜을 잡는 일은 이런 태도를 작게 연습하게 한다. + +## 내실은 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덜 흔들리는 일이다 + +예전에는 내실을 더 많이 채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. + +더 많이 공부하고, 더 많은 프로젝트를 만들고, 더 많은 글을 쓰고, 더 많은 도구를 +익히는 것. 물론 축적은 중요하다. 실제로 개발자는 계속 배워야 하고, 커리어를 +바꾸려면 준비도 필요하다.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. + +많이 채웠는데도 쉽게 흔들리는 날이 있었다. + +흔들리는 날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인풋이 아니었다. 새로운 강의도, 더 화려한 툴도, 더 +자극적인 성공담도 아니었다. 오히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. +무언가를 더 넣는 시간이 아니라, 이미 내 안에 쌓인 것들을 조용히 정리하는 시간이 +필요했다. + +안원잘부 미나미 편에서 받은 인상도 비슷했다. 내가 미나미의 삶을 다 아는 것은 +아니다. 다만 화면 속 서예 학원 장면에서, 바깥의 화려함과 별개로 정해진 시간에 몸을 +앉히고 손을 움직이는 태도를 봤다. 팬으로서의 호감보다 더 사적인 울림이었다. + +나에게도 비슷한 시간이 필요했다. + +새로운 AI 활용법을 익히는 시간도 나를 위한 시간일 수 있다. 개발 트렌드를 공부하는 +시간도 나를 위한 시간일 수 있다. 이직을 준비하는 시간도 결국 나를 위한 시간일 수 +있다. 하지만 배움과 준비가 계속 바깥의 기준을 향해 있을 때, 나는 나를 위한 시간을 +보내면서도 정작 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. + +붓펜을 쥐는 시간은 방향이 다르다. + +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지 않는다. 이력서에 적을 수도 없다. 생산성 도구로 +분류하기도 어렵다. 투자 대비 결과를 따지면 효율이 좋은 활동도 아니다. 바로 +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살린다. + +쓸모가 없어서,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 된다. + +## 취미는 도망이 아니라 돌아올 자리다 + +취미를 가진다는 말을 예전에는 조금 가볍게 생각했다. + +남는 시간에 하는 일, 스트레스를 푸는 일, 취향을 표현하는 일 정도로 여겼다. 요즘은 +조금 다르게 생각한다. 취미는 삶의 본업에서 도망치는 통로라기보다, 본업의 언어에서 +잠시 나를 데려오는 자리일 수 있다. + +이 자리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. + +내 경우에는 만원 남짓한 쿠레타케 붓펜 세트 하나면 충분했다. 리필 카트리지까지 +포함된 구성이라도 시작은 가벼웠다. 먹을 갈지 않아도 된다. 좋은 도구를 갖추지 +않아도 된다. 누가 봐도 훌륭한 글씨를 쓰지 않아도 된다. 중요한 것은 붓펜을 잡는 +시간이 온전히 나에게 돌아오는가다. + +하루 종일 바깥의 언어로 나를 설명하고 돌아온 날, 나는 종이 위에 조용히 한 글자를 +쓴다. 오늘의 불안이 조금 흔들린 선으로 남기도 하고,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은 날은 +획의 끝이 조금 단정해지기도 한다. 결과가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. + +붓펜 앞에서는 내가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. + +언젠가 다시 새로운 도구를 배울 것이다. 또 다른 기술 트렌드를 따라갈 것이고, +다음 기회를 위해 나를 설명하는 문장을 고칠 것이다. 거절도 다시 겪을 수 있다. +이 모든 일을 멈출 생각은 없다. 다만 속도를 따라가는 하루 사이에 작은 자리 하나를 +두려고 한다. + +화면을 끄고, 붓펜 뚜껑을 열고, 종이 위에 선을 긋는 자리. + +종이 앞에서는 아무도 나를 채점하지 않는다. 나도 나를 채점하지 않는다. 이미 지나간 +획을 받아들이고, 다음 획을 조금 더 단정하게 가져갈 뿐이다. + +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내실은 대단한 성장담이 아니라 이런 시간에서 시작되는 +것일지도 모른다. 더 빠르게 따라잡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,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+되는 것. 남에게 보여줄 결과를 하나 더 만드는 것보다,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+하나 갖는 것. + +그래서 나는 오늘도 거창한 준비 없이 붓펜 뚜껑을 연다. diff --git "a/posts/AI\353\245\274-\353\260\260\354\232\270\354\210\230\353\241\235-\353\266\223\355\216\234\354\235\264-\355\225\204\354\232\224\355\226\210\353\213\244/meta.json" "b/posts/AI\353\245\274-\353\260\260\354\232\270\354\210\230\353\241\235-\353\266\223\355\216\234\354\235\264-\355\225\204\354\232\224\355\226\210\353\213\244/meta.json" new file mode 100644 index 00000000..0b9b4d90 --- /dev/null +++ "b/posts/AI\353\245\274-\353\260\260\354\232\270\354\210\230\353\241\235-\353\266\223\355\216\234\354\235\264-\355\225\204\354\232\224\355\226\210\353\213\244/meta.json" @@ -0,0 +1,26 @@ +{ + "title": "AI를 배울수록 붓펜이 필요했다", + "slug": "learning-ai-made-me-need-a-brush-pen", + "description": "AI와 개발 트렌드, 이직 준비를 따라가며 나를 계속 채점하던 시기에 만원 남짓한 붓펜으로 사자성어와 가족 이름을 적으며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만든 이야기를 정리한다.", + "date": "2026-07-03", + "category": "Life", + "contentType": "essay", + "tags": ["Life", "Career", "Essay", "Hobby"], + "image": "/images/posts/AI를-배울수록-붓펜이-필요했다/minami-calligraphy-classroom.png", + "featured": false, + "visibility": "private", + "qualityReview": { + "philosophy": 4, + "design": 4.5, + "implementation": 4, + "brandFit": 3.5, + "clarity": 4.5, + "structure": 4, + "evidence": 4, + "usefulness": 3.5, + "originality": 4, + "polish": 4, + "reviewedAt": "2026-07-03", + "notes": "초안. 제목과 도입을 AI/자기채점 훅으로 조정했고, 미나미 영상은 직접 계기로 낮춰 표현했다. 사자성어와 가족 이름을 한자로 적어본 실제 연습 장면을 보강했다. 썸네일 권리 확인 전까지 비공개" + } +} diff --git "a/public/images/posts/AI\353\245\274-\353\260\260\354\232\270\354\210\230\353\241\235-\353\266\223\355\216\234\354\235\264-\355\225\204\354\232\224\355\226\210\353\213\244/minami-calligraphy-classroom.png" "b/public/images/posts/AI\353\245\274-\353\260\260\354\232\270\354\210\230\353\241\235-\353\266\223\355\216\234\354\235\264-\355\225\204\354\232\224\355\226\210\353\213\244/minami-calligraphy-classroom.png" new file mode 100644 index 00000000..75491673 Binary files /dev/null and "b/public/images/posts/AI\353\245\274-\353\260\260\354\232\270\354\210\230\353\241\235-\353\266\223\355\216\234\354\235\264-\355\225\204\354\232\224\355\226\210\353\213\244/minami-calligraphy-classroom.png" differ